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토 히로부미 (문단 편집) == 평가 - 전형적인 '''19세기 제국주의''' 정치인 == 일본 내에서는 온건파 코스프레를 했던 탓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그가 죽은 덕분에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와 패망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사람이 일본에서"만" 온건파였던 건 사실이다. 초대 총리로 입헌군주제의 확립 등 일본의 근대화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골수 천황주의 계열 보수파들과 대립하면서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며, 가급적이면 전쟁을 억제하려는 평화주의자적인 행보도 사실이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모두 개전에 반대했다. 이 점이 일본에서는 위인으로 취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안중근]] 의사에게 죽었을 때 실제로 기뻐한 것은 이토의 정치적인 적들이었던 보수파 정치인들인 것도 사실이라고. 마리우스 젠슨 같은 일본근대사 학자는 이토를 정치적 수완과 미래에의 비전을 동시에 갖춘, [[메이지]] [[원로(일본)|원로]]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반면 일본 제국의 폭주에 명확한 책임이 있는 군국주의자 야마가타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다른 원로들은 뭐 총리대신직을 감당할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 그냥 쩌리들이고, [[사이온지 긴모치]]는 다음 세대에 가깝다. 이토 히로부미는 경비가 많이 드는 합병보다도 조선을 완충지대로 두고, 강력한 일본의 영향력안에 드는 "조선의 속국화"를 기획한 약간은 온건주의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미 [[가쓰라 다로]] 등 정부 요인들의 조선병합이라는 결과를 승낙한 뒤,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 형식도 이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베트남 북부와 남부는 떼어내고 비록 중부 지역만을 명목상 주권자로 당시 베트남 황실이었던 [[응우옌 왕조]]에게 남겨졌지만 실상은 프랑스 식민 당국이 지배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당시 베트남에 황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누가 봐도 프랑스의 통치임이 명백했던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물의 출신 성분에 있다는 견해가 보통이다. 일단 정치적 성장 배경이 진보적 유신지사들이 주축이었던 조슈파였고, 그곳에서 정치적인 기반을 다졌기에 온건파의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초대 총리까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한론 정변에서 정한파를 몰아내고 승리한 주역으로서 [[일본 정부]]의 거두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다음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다른 말로 당시 이토의 제국주의 정책이 온건하게 보일 정도로 당시 일본에서 과격한 주장들이 많았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일본에서 [[영어]]에 능통하다는 점이 크게 먹고 들어갔다는 점이다. 측근에게 "난 지금 당장 정치가 그만 둬도, '''영어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동료 정치가들에게 '''직접 번역한''' 영미 신문 발췌본을 돌리기도 했을 정도로 영어를 잘 했다고 한다. 즉 자기 실력 이전에 정치적 뒷배경이 그를 온건파로 보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거기다 온건파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총리가 되었으니 온건파 코드 인사 등용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또 영어에 능통하여 서양 문물과 당시 세계 정세를 잘 알다보니 이 사람의 정책 기조가 '''서양식 국가'''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본주의니 민주주의니를 도입하며 국가간 평화 등을 강조하면서도 제국의 확장에 열중하는 서구 열강의 모습까지 그대로 카피해버렸다! 이 때문에 강대국의 입장이 되기 위해 근대 제국주의를 그대로 수용한, 말 그대로 전형적인 '''[[19세기]] 정치가'''였다. 그리고 [[고종]]은 이런 인물에게 대한제국의 최고훈장인 [[금척대훈장]]을 내리며 꼬시려고 했다. 사람을 잘못 고른 셈… 그런데 오판은 심지어 이토를 암살했던 안중근 의사까지도 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순 있겠다. 죽기 전에 [[규장각]] 보관문서 1,079권을 대출했는데, 도중에 안중근에게 처단당하였기 때문에 반환하지 못했다. 현재까지의 연체료를 계산하면 '''대략 37억 원.''' 규장각 장서들은 현 일본 황실 도서관의 전신인 도서료에 보내졌고, 이 장서들은 이후 일본 황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 중이었다. 원래 일본에서는 한국에 돌려줄 마음이 없었으나 2010년 하반기 [[간 나오토]] 내각과의 협의 결과 1,205권을 마침내 반환받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조선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조선에 올 때마다 [[기생]]집에서 놀기를 즐겼으며 조선인 [[첩]]도 있었다(...) http://www.imaeil.com/news_img/2009/soc/20090828_161108000.jpg 조선옷을 입은 사진도 여럿 남아있다. 이토의 평소 생각이 드러난다. 조선 그 자체의 문화와 사회는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황실에 전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 본마누라 우메코(梅子)에게 조선옷을 입히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가운데의 [[갓]] 쓴 노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사진만 보면 그냥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맘씨좋은 동네 할아버지]]로 보인다-- [[http://media.daum.net/foreign/asia/view.html?cateid=1042&newsid=20060605035007603&p=donga|기사 링크]]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42338054|책 링크]] 또한 [[을미사변]]에 당시 총리였던 이토를 비롯해서 [[무츠 무네미츠]] 등 일본 내각이 개입했다는 증거 자료가 공개되었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친한파]]이며, 한국 근대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진보 중에서는 김기협 같은 작가들도 [[고종]]을 까다가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토는 식민지 주민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대단히 제국주의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이 보호국이란 이집트에서의 [[영국]]과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서부에서의 [[미국]]처럼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긴 사례처럼 지역 또는 국권을 강탈하는 포석이 되기 때문이다. 한일병합을 묵인하고 [[을사늑약]], 고종 폐위를 통해 조선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노예'를 다루듯이 '채찍과 당근'처럼 채찍을 '덜' 때리면서 이를 통해 조선 사람들을 감화시키려 한 인물이다. 당연히 이런 행보를 일반 백성들이 알리 없었고 이토의 겉모습에 속아넘어가 친일파들이 대량으로 늘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 이토는 조선 백성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던 '''대단히 제국주의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격이다. 대외적(백성)으로는 감화정책을 펼쳤지만 내부적(조선)으로는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인간으로 조선 사람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던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의 국가 정체성을 잃게 만들어 저항의 의지를 흐리는 식으로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만약 이토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과격한 군부가 감화 정책을 통해 조선을 부드럽게 스며들게 해 조선은 독립의 의지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19세기의 [[영국]]이 연상될 정도다. 이토가 온건파였기에 안중근 의사가 국제정세에 더 밝았다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만약 그 이야기대로 이토의 생각대로 온건적인 운영이 이뤄졌다고 해도 우리나라에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변할 게 없다. 단기적으로 볼 때는 조선에 미치는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서도 장기적으로 보면 조선 내의 반항을 줄이고 친일파의 득세를 통한 문화적인 종속을 꾀했기 때문에 독립군의 규모도 자연스레 줄어들고 그 의지도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안그래도 지금까지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한국인데 이토의 계획대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해이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하게 된다면 직접적인 피해는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나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현재보다 훨씬 더 큰 리스크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토의 암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위험한 변수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토의 이후 계획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이토가 조선을 수탈하거나 조선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기도 힘들다. 비록 온건파라고 해도 을미사변의 배후로 지목되는 만큼 잔혹한 행동을 해야 할때는 할 수도 있을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토의 성향을 모아봤을 때 그가 살아있어서 꼭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조 히데키]] 같은 놈은 여전히 살아있으니…-- [[안중근]] 항목에서도 나와있지만 일본 내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일본 위인들에게 바쳐지는 [[신사(신토)|신사]]가 없을 정도다. 예전엔 있었다. 한일병합 이후 경성부 종로에 박문사라고 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가 건립되긴 했지만 [[8.15 광복]] 이후 파괴되었다. 그리고 현재 일본 본토에는 그를 기리는 신사는 없다고. 대신 [[요시다 쇼인]]을 주제신으로 하는 쇼인신사에서는 그의 제자들도 신으로 섬기는데 제자들 명단에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도 있다. 뒤에 나오듯이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디즈레일리]],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처럼 근대화의 주역이기에 평가는 엇갈려도 대체로 위인 취급은 해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